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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초(一草) 박삼옥(朴三玉)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

    오피니언 2022. 2. 3. 11:17 Posted by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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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삼변'의 묘소(왼쪽부터 산강,일석,수주-맨오른쪽

    “생시에 못 뵈올 임을” 뵙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꿈에나 뵐 가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이 시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이 1924년에 쓴 “생시에 못 뵈올 임을”의 전반부(前半部)로서,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능골산에 있는, 그의 묘소 앞 기념비(紀念碑) 오석(烏石)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앞 첫머리의 시제(詩題)처럼 결코 ‘생시에 못 뵈올 임’이었던, ‘수주’의 묘소에 내가 들르게 된 것은 참으로 뜻밖에 이루어졌다. 줄곧 40여년을 서울의 동쪽 끝인 강동구(江東區)에서만 살다가, 2017년 7월부터 인천에 사는 아들네와 가까이에 다가가고자, 서쪽 끝인 강서구(江西區)의 까치산기슭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옮겨 산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집으로부터 걸어서 20분 남짓 걸리고, 서울과 부천이 맞닿는 곳에 자리한 서서울호수공원을 처음 찾아 갔을 때의 일이다. 옛 신월정수장을 리모델링하여 친환경테마파크로 탈바꿈시킨 서서울호수공원에 다다라서, 이 공원의 독특한 볼거리인 소리분수 그러니까 김포공항에 내리는 비행기의 굉음(轟音)에 따라, 호수에 설치된 41개의 분수가 차례로 자동 분출(噴出)하는 광경을 한동안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어서 몬드리안 정원 등 공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발걸음을 옮겨, 서울특별시 양천구와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나지막한 능골산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능골산, 밀양 변씨 선산이다

    그리하여 김포공항 쪽으로 뻗은 오르막길을 약 5∼6분 정도 걸어간 지점에서, [변영로 묘 ‧ 기념비]라는 화살표 모양의 팻말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정말 여기에 수주(樹州)의 묘소가 있을까”라고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 왼쪽 방향으로 20미터 정도를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이곳이 조선시대 부평도호부-지금 경기도 부천시 지역-에서 태어나, 조선 세조(世祖)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의 분묘를 비롯하여, 대대로 이어온 밀양(密陽) 변시(卞氏)의 종중 선산이었다, 아울러 이 산을 능골산(陵谷山)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공장공의 분묘 때문에 붙여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관리의 묘소가 있는 산은, 비록 왕릉은 아니라하더라도 능(陵)자를 붙여 능골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올곧은 애국자인 삼변형제들!

    이곳 변문(卞門)의 분묘들 가운데 내가 찾아간 수주 변영로(卞榮魯)의 봉분은, 맏형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과 둘째형인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와 나란히 맨 오른쪽에 조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대한민국의 올곧은 애국자인 삼변형제(三卞兄弟)로 칭송받았던, 세 분의 봉분 앞에 각각 세워진 묘비와 기념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쪽에는 대한제국 고종 때 삼화감리(三和監理)를 지낸, 삼변형제의 부친인 변정상(卞鼎相) 공의 봉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나는 삼변(三卞)의 봉분 앞에서 눈을 감고 묵념으로 나름대로 예를 올렸다. 이어서 경건한 마음으로 세 분의 행적을 새긴 기념비의 글들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특히 수주의 기념비에는 저명한 국문학자였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 1896~1989) 박사가 찬(撰)한 글이 눈길을 끌었다. 어쨌든 내가 세 분의 행적들을 다 읽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결렸지만 그 내용을 짧게 간추리면 이러하였다.

    맏이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 1889~1954)은 한학자이며 국학자이고 법률가로서, 일제하의 법관을 거부하고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북경 국제 조선 대표변호사를 하였고 광복 후에는 대법관으로 빈민특위(反民特委) 특별재판부 재판관을 역임한 판사였다. 둘째인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 : 1892~1967)는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최초로 독도 영유권을 외교문서인 구상서(口上書)로 전달하였다. 그리고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고히 실증하였고, 그 뒤 국무총리를 4년간 역임한 대쪽 같은 성품의 공직자였다.

    셋째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 1898~1961)는 가혹한 왜정에 비분강개(悲憤慷慨)로 맞선, 민족시인이며 영문학자이고 번역가이며 언론인이었다. 그리고 풍자(諷刺)와 해학(諧謔)과 재기(才氣)가 넘치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호탕탕(浩浩蕩蕩)한 문인이었다. 따라서 세 분을 아주 짤막하게 평하면, 맏이인 변영만(卞榮晩)은 지조 높은 법률가였고, 둘째인 변영태(卞榮泰)는 청렴한 정치가였으며, 막내인 변영로(卞榮魯)는 강직한 문학가였다. 이렇듯 세 분 모두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는 애국애족(愛國愛族)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지금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삼변형제(三卞兄弟)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2.수주,변영로의묘1 


    유독 수주의 문학정신을 기리다

    흔히 우리는 무덤을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삼변(三卞)의 무덤에서 무엇을 깨달았고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다짐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이후 몇 차례 더 삼변의 묘소를 다녀오고 아울러 묘소 아래 마을인 고강동(古康洞) 주변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관련 자료들도 샅샅이 찾아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렇게 두루 살펴본 결과 삼변의 고향이며 묘소가 있는 경기도 부천시(富川市)에서, 법률가와 정치가로 활약한 변영만과 변영태에 대해서는, 부천삼변(富川三卞)으로 묶어서 세미나를 개최한 적은 있으나 개별적으로 특별하게 기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학가였던 변영로에 대해서는 유독(惟獨)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그의 문학정신을 적극 기려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3.수주 변영로 기념동상

    즉, 부천시 고강동 삼거리에 ‘수주 변영로선생 기념동상’과 부천중앙공원에 ‘수주 변영로 논개 시비’가 세워져 있다. 또 역곡과 고강동을 잇는 도로는 수주로(樹州路)라고 부르고 있고, 묘소 바로 인근에는 미래 새싹들의 배움터인 ‘수주초등학교’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부천지역 문인단체에서는 ‘수주학생백일장’을 거행하고, 시 전문 무크지(mook誌)인 ‘수주문학’도 발행하고 있다. 

    4..부천중앙공원수주'논개'시비


    그런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부분은 1999년에 ‘수주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수주문학상은 2018년부터는 부천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수주문학제’로 규모를 확대하여 시행하고 있다. 덧붙여 수주의 문학적인 성과는 부천시가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는데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 기리는 것이 있다. 바로 수주의 항일정신이다. 친일문학론을 저술한 임종국(林鍾國 : 1929~1989) 선생은 수주를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가운데, 지조(志操)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으로서 “끝까지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 15인”의 명단에 넣고 있다. 이것은 수주가 보인 백절불굴의 항일정신과 우국지사적인 면모를 객관적으로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결국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

    그렇다면 삼변(三卞)이 각각 법조계·정계·문학계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부천에서 법률가와 정치가였던 두 형들의 업적보다, 문학가였던 막내 수주의 문학정신과 성과만을 적극 기리며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것은 흔히 법과 정치의 힘이 매우 세고 오래간다고 믿지만, 사실은 문학의 힘이 훨씬 더 세고 오래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뚜렷한 본보기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나는 삼변의 묘소를 다녀오고 나서, “법과 정치의 힘보다 문학의 힘이 더 세고 오래 간다”는, 바꿔 말하면 “법과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런데 앞 구절가운데 ‘법’은 정치의 영역이므로 이를 지우면, 결국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로 매듭지어진다. 바로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라는 메시지는 저 세상의 수주가 이 세상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화두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모름지기 일념으로 깨쳐가야 할 큰 명제(命題)로 여겨졌다.

    ‘논개’ 詩와 맺은 세 번의 인연!

    이렇듯 저 세상에서도 우리를 깨우치는 수주 변영로(卞榮魯)선생! 하지만 나는 수주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1962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상경하였을 때 그는 이미 한 해전에 작고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주와 생전의 인연은 원천적으로 이루어 질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일제의 압정이 극심하였던 1922년에 발표되어 훗날 그의 대표적인 절창시(絶唱詩)가 된, ‘논개(論介)’를 통해 간접적인 인연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내가 대학생이었던 젊은 시절에 문득 문득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솟구칠 때면 곧잘 수주의 시 ‘논개’를 읊곤 하였다. 특히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라는 도입부가 가슴에 와 닿았었다. 지금에 와서 새삼 되돌아보니 나라를 위한 마음은 “종교보다 깊고 민족을 위한 정열은 사랑보다 강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내 마음이었던 같다.

    5.진주성 수주''논개' 시비


    두 번째는 내가 국민체육진흥공단과 창원경륜공단에서, 공익적 자전거경주인 경륜(競輪)사업에 관계하며 자전거타기의 여러 장점들을 터득하였다. 그래서 (사)한국자전거문화포럼을 창립하고, [자전거'살림길'운동]을 펼치며 이루어졌다. 2012년 처음 진주(晉州) 남강 자전거길을 ‘살림길’로 선정하고 자전거로 진주성의 ‘논개’ 시비에 다가갔다. 그리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의녀(義女) 논개(論介)가 몸을 던진 의암(義巖)을 바라보며, 단원들과 함께 수주의 시 ‘논개’를 크게 낭송하였다.

    그 때는 정말 그랬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는 후반부에 감동되어 눈물도 흘렸다. 이후에도 2016년까지 매년 남강 자전거 ‘살림길’에 가서, ‘논개’ 시를 읊고 논개의 혼을 기렸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자전거'살림길'이야기] 5권에 고스란히 담아 널리 배포하였고 지금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미 앞부분에서 밝힌 것처럼 참으로 뜻밖에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던, 수주(樹州)의 능골산 묘소에 들르게 되었다. 결국 그 인연으로 삼변형제(三卞兄弟)의 업적 특히 수주의 문학적인 정신과 성과가, 그의 고향 부천에서 여태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음에 큰 감명과 영감을 받았다. 누가 뭐래도 캄캄한 일제(日帝)의 질곡(桎梏) 속에서 수주가 절규했던 우국(憂國)의 시(詩)인 ‘논개’를 통해서, 그동안 맺은 원력(願力)들이 나로 하여금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라는 이 글을 쓰게 하였으리라.

    나직하게 ‘논개’ 詩를 읊조리다

    2018년 12월 27일 나는 (사)국제문인협회의 종합문예지인 <국제문예>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고 수필가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기해년(己亥年) 설을 쇤 다음 날인 2019년 2월6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주가 영면(永眠)하고 있는 능골산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의 봉분 앞에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이윽고 나는 나직하게 ‘논개’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 아니 붉으랴/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수필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리라!

    다 읊조리고 나니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논개(論介)의 마음이 흐르는 진주(晉州) 남강(南江)이 떠올랐다. 창원경륜공단 이사장과 (사)한국자전거문화포럼 회장으로, 진주 자전거행사 때 마다 남강에 갔던 추억이 아련하다. 그래서 일까. 어쩐지 오늘 이곳 수주가 잠든 능골산에서 바라보는 서쪽 하늘은,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르고 석양의 노을은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것 같다. 아니 정녕 내 마음이 그러하였으리라.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한다.

    그렇다! 나는 젊은 시절 한 때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 정치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치가 만능인 시대는 분명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정치는 짧고 문학은 길다”라는 수주(樹州)가 내게 던진 화두를 참구(參究)하고자, 문학의 장르(Genre)가운데 ‘수필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리라! 그리하여 따뜻한 글들을 통해 우리이웃과 우리나라를 다 함께 포근하게 꼭 감싸 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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