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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pop케이팝은 Korean Popular Music의 약자 한국서 기원한 음악 장르

    snsnews 2021. 10. 12. 02:18 Posted by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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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살k 뮤직컬 공연 장면 (SNS = FDNnews) 솔로 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 최봉혁 기자 


    (SNS = FDNnews) 솔로 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 최봉혁 기자 = K-pop (한국어: 케이팝)은 Korean Popular Music의 약자이며 한국 문화의 일부로 한국에서 기원한 음악 장르이다. 한국의 전통 음악에 뿌리를 둔 pop, rock, jazz, gospel, hip hop, R&B, reggae, electronic dance, folk, country, classical 등 세계 각국의 스타일과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 1992년 초기 K-pop 그룹 중 하나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결성과 함께, 더욱 현대적인 장르가 등장했다. 다양한 스타일과 음악 장르에 대한 실험과 외국 음악적 요소의 통합으로 한국의 현대 음악계를 현대화한다.
     

    현대 K팝 '아이돌' 문화는 소년 그룹 H.O.T.로 시작됐다. 1996년, K-pop이 10대와 청년층의 거대한 fandom(가수, 배우, 운동선수 따위의 유명인이나 특정 분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나 그 무리)을 축적하는 하위문화로 성장하면서, 초기 K-pop의 침체 이후, 2003년 12월 26일에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한 대한민국의 2인조 소년 그룹 동방신기와 보아는 이웃 일본 시장에 음악 장르를 개척하고 오늘날 국제적으로 K-pop 대중화를 계속하는 차세대 K-pop 아이돌을 시작했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와 한국 TV 프로그램의 출현으로 현재 K-pop과 한류(韓流)로 알려진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확산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라틴 아메리카,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 중동 및 서구 전역에서 광범위한 글로벌 청중을 확보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K팝'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예전에는 한국 대중가요를 가요(가요)라고 불렀다. \"K-pop\"은 한국에서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이지만 여기에서 설명하는 장르에 대해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2018년 K-pop은 17.9%의 매출 증가율을 기록하며 큰 성장을 이루면서 '파워 플레이어'가 되었다. 국제음반산업연맹의 '글로벌 뮤직 리포트 2019'에 따르면 2019년 기준 K팝은 전 세계 10대 음악 시장 중 6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방탄소년단(BTS)과 Blackpink (블랙핑크; 2016년 결성 South Korean girl group)가 시장 성장을 주도하는 아티스트로 꼽혔다. 2020년 K팝은 44.8%의 성장률을 기록, 그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는 기록적인 한 해를 보냈다.
     

    K-pop은 일반적으로 한국의 대중음악을 지칭하지만, 일부에서는 K-pop을 광범위한 음악적, 시각적 요소를 보여주는 포괄적인 장르로 간주한다. 
     

    대한민국의 매니지먼트 에이전시인 SM Entertainment Co., Ltd.(1995년 설립), YG Entertainment Inc.(1996년 설립), JYP Entertainment Corporation(1997년 설립)는 잠재적인 아티스트에게 때로는 어린 나이에 구속력 있는 계약을 제안한다. 연습생들은 규제된 환경에서 동거하며 데뷔를 준비하기 위해 음악, 춤, 외국어 및 기타 기술을 배우며 하루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로봇\" 훈련 시스템은 종종 서구 언론에서 비판을 받는다. 2012년 월스트리트저널은 SM 엔터테인먼트 산하 한국 아이돌 1명의 훈련 비용이 평균 300만 달러라고 보도했다.
     

    K-pop은 \"엄격한 상업적 가치를 넘어선 가치, 정체성, 의미\"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 상품이다. 현대적인 서양 사운드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향(hip hop, R&B, Jazz, black pop, soul, funk, techno, disco, house, Afrobeats의 사운드)과 한국적인 퍼포먼스 (싱크로나이즈드 댄스 동작, 포메이션 변경, 후킹 및 반복적인 키 동작으로 구성된 소위 \"포인트 안무\")가 섞여 있다. 한국 대중문화에는 '근대화의 비전'이 내재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K-pop의 초국가적 가치가 그 성공의 원인이 된다. 다양한 민족, 국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K-pop에 내재한 초국가적 가치에는 고품질의 결과물에 대한 헌신과 아이돌(idol)의 표현, 그리고 그들의 훈련 기간에 의한 직업윤리와 예의 바른 사회적 태도가 포함된다. 
     

    현대 케이팝은 영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계 미국인 및/또는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은 유창한 영어와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문화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국인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Fly to the Sky(South Korean R&B duo), G. O. D.(1999년 결성 South Korean boy band), (born 1976), Yoo Seung-jun(유승준, Korean-American singer and actor), Drunken Tiger (드렁큰타이거: 1999 데뷔, Korean hip hop group) 등 한국계 미국인 가수나 그룹의 한국 대중음악은 미국식 가사와 영어 가사가 모두 있다. 이러한 한국계 미국인 가수들의 음악은 일반적인 한국 음악과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Black Eyed Peas의 리드 멤버인 will.i.am (American rapper, songwriter)과 Sean Garrett (American R&B singer, songwriter)과 같은 K-pop 아이돌의 노래 작업에 외국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점점 더 많이 고용되고 있다. Akon (born 1973, Senegalese-American songwriter), Kanye West (born 1977, American rapper, songwriter), Ludacris (born 1977, American rapper and actor), Snoop Dogg (born 1971, American rapper)와 같은 래퍼를 비롯한 외국 뮤지션들도 K-pop 노래에 featuring(특별 출연)을 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K-pop을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수들은 아시아의 다른 지역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영어를 사용해야 하고, 결국 서양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대부분의 K팝 가수들은 영어가 음악계의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지만, 일부 가수들은 일본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일본어 등 다른 외국어도 배우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점점 더 많은 K-pop 밴드들이 한국 이름보다 영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래와 아티스트를 전 세계의 더 많은 청중에게 판매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북미 시장에서 K-pop의 인기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평론가들에게 그 이유는 이 장르가 서양 음악의 증류(蒸溜)된 버전으로 볼 수 있어 K-pop이 이러한 시장에서 수용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관객들은 음악의 진정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아이돌 체제가 억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티스트 이름, 노래 제목 및 가사는 영어 단어 사용에서 상당한 성장을 보였다. 1990년 차트 50위권에는 이름에 영어가 포함된 가수가 없었다. 한국 음악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국 이름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1995년엔 김건모, 박미경, 박진영, 이승철, 변진섭 등 가장 인기 있는 가수들이 여전히 한국 이름을 사용했지만, 상위 50위 안에 드는 가수와 그룹 중 DJ D.O.C. (hip-hop trio), 015B (공일오비, music duo), Solid (솔리드, R&B/Hip-Hop trio)를 포함한 14명이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정부는 영어 가사 검열을 중단하고 한국은 영어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가수의 이름, 노래 제목 및 가사에 대한 영어 사용이 빠르게 증가했다. 2000년에는 차트 상위 50위 안에 17명의 가수가 영어 이름을 사용했고 2005년에는 31명이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2010년에는 상위 50위 안에 41명의 가수가 영어 이름을 사용했지만, 일반적으로 3~4명의 가수와 그룹이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동시에 차트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노래. 한국식 이름(예: 백지영, 서인영, 허각)은 덜 자주 보이고 많은 K팝 가수들은 영어 이름(예: IU, Sistar, T-ara, GD&TOP, Beast, After School)을 사용한다. 특히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어 이름을 가진 음악가들은 한글로 음역했지만, 이제는 가수들이 영문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을 사용한다. 1995년에는 상위 50위권 차트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노래 제목의 비율이 8%였다. 이는 2000년 30%, 2005년 18%, 2010년 44% 사이에서 변동했다. 영어 가사의 비중이 높은 한국 노래의 예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매되어 많은 성공을 본 Kara (2007년 결성, pop girl group)의 〈점핑〉이 있다. 
     

    한국에서는 장르가 등장한 이후로 장르의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인 반응이 나왔다. 이 지역의 저명한 음악 평론가들은 K-pop을 \"처음부터 세계 시장에서 주로 국가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고안된 산업 레이블\"이라며 K-pop을 \"대중문화로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기획안은 “실제로는 장르가 한국의 전통적 정체성과 거의 관련이 없지만” 상업성을 고려한 것이다. 장르 이름이 J-pop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K-pop은 때때로 음악을 형식적이고 독창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언론인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일부 K-Pop 그룹은 서양 음악 행위와 다른 음악 행위를 표절(剽竊)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K-pop은 영어 표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비판을 받았고 비평가들은 제목에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무의미한\" 일이라고 불렀다.
     

    K-Pop 그룹은 특히 아이돌 그룹의 무대 스타일링에 Cornrows(흔히 흑인들이 하는 여러 가닥으로 딴 머리)와 두건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같은 문화의 문화적 전용(轉用)에 대해 정기적으로 비난을 받아 왔다. K-Pop 그룹은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인디언 문화를 전용한 혐의(嫌疑)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 이외의 문화에서 문화적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 실제로 문화적 차용을 구성하는지 또는 이러한 문화적 차용이 전혀 부정적인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많은 기획사가 라디오가 아닌 온라인 마케팅과 텔레비전 방송 프로모션으로 구성된 '데뷔 쇼케이스'를 통해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룹에는 마케팅 후크와 함께 이름과 \"개념\"이 지정된다. 이러한 개념은 아이돌 그룹이 데뷔 또는 컴백할 때 활용하는 일종의 시각적, 음악적 테마이다. 데뷔할 때마다 콘셉트가 바뀔 수 있고, 팬들은 종종 소년 그룹 콘셉트와 소녀 그룹 콘셉트를 구분한다. 개념은 또한 일반 개념과 귀엽거나 환상과 같은 주제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신인 아이돌 그룹은 성공적인 데뷔를 보장하기 위해 시장에 잘 알려진 콘셉트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기존 구성원들 사이에서 하위 단위 또는 하위 그룹이 형성된다. 두 개의 예시적인 하위 그룹은 Super Junior 멤버 규현 Cho Kyu-hyun (born 1988), 려욱 Kim Ryeo-wook (born 1987), 예성 Kim Jong-woon (born 1984)으로 구성된 Super Junior-K.R.Y.와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K-pop 하위 그룹 중 하나가 된 Super Junior-M이다.
     

    온라인 마케팅에는 전 세계 청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YouTube에 게시된 뮤직비디오가 포함된다. 실제 영상에 앞서 예고편 사진과 예고편을 공개한다. 후속 싱글의 활동 주기는 해당 뮤지션이나 그룹이 활동을 중단하지 않은 경우에도 컴백이라고 한다.
     

    댄스는 K-POP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여러 명의 가수를 합칠 때 노래와 춤을 추면서 동시에 위치를 바꾸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자리 바꾸기\"(한국어: 자리바검)라고 하는 전략이다. K-pop 안무(按舞)에는 종종 \"포인트 안무의 특성에 맞는 안무 내에서 훅과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구성된 춤을 가리키는 \"포인트 댄스\"가 포함된다.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와 Brown Eyed Girls (South Korean girl group)의 〈Abracadabra〉가 포인트 안무가 돋보이는 곡들이다. 노래를 위한 춤을 안무하려면 작가가 템포를 고려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K-pop 안무가들은 동작을 단순화해야 한다.
     

    K팝 아이돌이 업계에서 성공하고 춤을 잘 추는 데 필요한 훈련과 준비는 혹독하다. 서울의 Def Dance Skool과 같은 훈련소는 청소년들이 아이돌이 될 기회를 주기 위해 댄스 실력을 길러준다. 학생 일정의 대부분이 춤과 운동을 기반으로 하므로 체육은 학교에서 가장 큰 초점 중 하나이다. 엔터테인먼트 레이블은 매우 선별적이어서 명성을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의 학생들은 K-pop 그룹의 활기찬 일상을 준비하기 위해 춤의 숙달에 평생을 바쳐야 한다. 회사는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훨씬 더 큰 교육 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현대 케이팝 그룹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룹은 랩과 미국 힙합 관습을 그들의 음악에 통합함으로써 한국 음악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이 서양 스타일의 채택은 소년 밴드의 패션으로 확장되었다. 멤버들은 힙합 미학을 채택했다. 〈난아라요〉(난 알아요, I Know) 프로모션 주기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의상은 큰 치수 티셔츠와 스웨트셔츠와 같은 생동감 넘치는 스트리트웨어, 윈드 브레이커, 가죽끈 하나로 착용하는 작업복, 한쪽 다리를 걷어 올려 착용하는 작업복, 및 미국 스포츠팀 유니폼 액세서리에는 거꾸로 착용하는 야구 모자, 버킷 모자 및 Do-rag가 포함되었다. 
     

    K-pop은 \"포스트 서태지(post-Seo) 트렌드에서 태어났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뒤따르는 많은 행위가 같은 차림새를 채택했다. Deux (K-pop duo)와 DJ DOC도 처진 헐렁한 팬츠, 운동복, 반다나 등 유행을 따르는 힙합 패션을 선보이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데뷔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패션 추세를 반영한 ​​코디 의상을 입고, 90년대 후반 가장 유행했던 힙합 패션은 남아 아이돌 그룹 H.O.T. 그리고 젝스키스 Sechs Kies (1997 데뷔)의 데뷔곡 스타일. 스키 고글(머리나 목에 착용), 헤드폰을 목에 걸고, 안무를 강조하기 위해 착용하는 큰 치수 장갑 등 액세서리를 활용해 일상 패션에서 퍼포먼스 의상으로 아이돌의 스타일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HOT의 1996년 히트곡 〈Candy〉는 각 멤버가 지정된 색상을 입고 페이스페인팅, 퍼지 큰 치수 벙어리장갑, 바이저, 버킷햇, 이어머프 등으로 장식하고, 봉제 인형, 배낭, 메신저 백 등의 소품을 활용해 아이돌 의상을 고려한 코디의 정도를 보여준다. 
     

    남자 아이돌 그룹의 의상은 비슷한 배색, 천,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멤버가 착용하는 의상은 여전히 ​​개성을 유지했다. 한편, 90년대 여성 아이돌 그룹은 획일적인 의상을 입고, 종종 같은 스타일을 입기도 했다. 여성 아이돌의 초기 활동 비용은 청순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 SES 데뷔 《I'm Your Girl》, Baby Vox의 1998년 두 번째 앨범 《Ya Ya Ya》에는 흰색 의상을 입은 소녀들이 등장했으며 Fin.KL의 《To My Boyfriend》는 핑크색 여학생 의상을 입은 아이돌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소 삭발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장신구는 큰 리본, 치장한 머리 장식, 헤어밴드로 한정했다. 1990년대 후반 여성 아이돌 그룹의 성숙과 풍선껌 팝의 철폐와 함께 여성 아이돌 그룹의 세트는 당시 패션 트렌드를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대부분이 노출 조각이었다. 최근 소녀 그룹 Baby Vox와 Jewelry의 활동은 핫팬츠,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배꼽티, 농민 블라우스, 투명 의상, 상반신 블라우스 등 트렌드를 잘 보여준다.
     

    2000년대 후반부터 K-pop이 서양 문화와 아시아 문화의 현대적 하이브리드가 되면서 K-pop 내의 패션 트렌드에도 다양성과 차별성이 반영되었다. 
     

    K-pop은 아이돌이 시작한 트렌드를 따라 젊은 관객이 찾는 아시아의 패션에 큰 영향을 미친다. G-Dragon (권지용; born 1988, South Korean rapper, singer-songwriter, record producer and fashion designer, \"King of K-pop\"), 미국 패션디자이너 Jeremy Scott (born 1975)과 반복적으로 작업한 CL (Lee Chae-rin, born 1991, South Korean rapper) 등 일부 아이돌은 그의 '뮤즈'로 불리며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K팝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젊고 때로는 귀여운 표정으로 날씬하고 키가 크며 여성스러운 모습을 강조한다.
     

    K-pop의 대중성을 확대하기 위한 정부의 주도는 대부분 한국 문화원의 전 세계 설립을 책임지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 대사관과 영사관도 해외에서 K-pop 콘서트를 조직했으며 외교부는 정기적으로 해외 K-pop 팬을 한국에서 열리는 K-Pop World Festival에 초청한다.
     

    한국 정부는 K팝의 인기에 따른 경제적 이익과 더불어 외교에서도 K팝의 영향력을 이용하고 있다. 대중매체 시대에 문화적, 이념적 힘으로 이해관계자를 설득하여 목표를 추구하는 소프트파워는 이해관계자로부터 직접적 위협 등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존의 외교전략인 하드파워보다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외교 전술로 인식되고 있다.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재로 케이팝을 통한 문화외교는 일종의 소프트파워이다.
     

    K-pop을 통한 한국 정부의 외교 노력의 예로는 K-pop 음악 시상식인 MAMA(Mnet Asian Music Awards)가 있다. 박근혜 (1952년 2월 2일생) 한국 대통령은 한국 중소기업청(SMBA)이 후원하고 홍콩에서 열린 2014 MAMA에서 개회사를 했다. 이 행사는 한국 정부가 국가의 국제적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 문화 산업을 지원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으로 간주하였다.
     

    문화외교의 또 다른 예는 북한에서의 K-pop 공연이다. 2005년 이전에는 남한의 대중가수들이 가끔 북한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10여 년의 공백기를 거쳐 3월 31일에는 유명 뮤지션 Red Velvet (South Korean girl group), 이선희, 조용필, 윤도현 등 남측 연주자 약 190여 명이 평양에서 공연을 펼쳤다. 2018년 4월 3일. 김정은 (金正恩: 1984년 1월 8일생)이 객석(客席)에 있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1885년 미국 선교사인 Henry Appenzeller (1858~1902, American Methodist missionary)가 학교에서 미국과 영국의 민요를 가르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노래는 한국어로 창가(唱歌)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한국 가사로 부르는 인기 있는 서양 선율을 기반으로 했다. 예를 들어 〈Oh My Darling, Clementine〉은 '심청가'로 알려지게 되었고, 일제강점기(1910~1945)에 한국인들이 음악을 통해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명하면서 창가의 인기가 높아졌다.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는 〈희망가〉였다. 일본은 기존의 창가집을 몰수하고 독자적으로 가사집을 출판했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앨범은 1925년 박채선(朴彩仙: 1902년생)과 이유색(李柳色: 1893년생)의 〈이 풍진 세월호〉로 일본에서 번역된 대중가요를 수록했습니다. 한국 작곡가가 작곡한 최초의 팝송은 1929년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로 여겨진다. 1920년대 중반 일본의 작곡가인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는 187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도입한 복음 음악에 한국의 전통 음악을 혼합했다. 이러한 유형의 음악은 일본에서 Enka(演歌)로 알려졌고 나중에 한국에서는 Korean Trot로 발전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후, 서양식 술집과 클럽에서 서양 음악을 연주하는 소수의 서양 문화가 남한에 소규모로 유입되었다. 한국전쟁(1950-53) 이후 미국 군대가 남한에 남아서 미국 문화와 세계 문화가 남한에 퍼지고 서양 음악이 점차 수용되게 되었다. Nat King Cole (1919~1965), Marilyn Monroe (1926~1962), Louis Armstrong (1901~1971)과 같은 미국 엔터테인먼트의 저명한 인물들은 한국에서 미국군대를 위해 USO 쇼를 개최했다. 이러한 방문은 한국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57년에는 주한미군 네트워크(AFKN) 라디오가 방송을 시작하여 서양 음악의 대중성을 전파했다. 미국 음악이 한국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5음 음계(pentatony)가 점차 7음(heptachords)으로 바뀌고 대중가요가 미국 음악을 본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LP 음반의 발달과 녹음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음색이 추구되었다. 미국에서 공연할 뮤지션을 모집하기 위한 공개 오디션도 열렸다. 군대 클럽.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궁핍해지면서 실력파 가수들이 미국을 위해 공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군대는 돈을 벌기 위한 좋은 수단이다. 많은 가수가 미군을 위해 노래를 불렀는데, 대개는 전용 클럽이 264개로 늘어났다. 그들은 컨트리 음악, 블루스, 재즈, 로큰롤과 같은 다양한 장르를 연주했다. 한국 경제는 개화하기 시작했고 대중음악은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에 의해 퍼진 추세를 따랐다. 한국 영화도 발전하기 시작했고 한국 음악가들은 더 많은 관객에게 공연하기 시작했다.
    비틀 마니아가 한국에 상륙했을 때 국내 최초의 록 밴드가 등장했고, 그 중 첫 번째 밴드가 1962년에 결성된 밴드 Add4의 리더 Jung-hyeon (申重鉉; born 1938)라고 한다. 1968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록 밴드를 위한 재능 경연대회가 조직되었다.
     

    몇몇 한국 가수들은 국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9년 Kim Sisters(1953년 결성)는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한국 아티스트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앨범을 냈다. 그들의 \"Charlie Brown\" 커버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7위에 올랐다. 김시스터즈는 TV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으며 미국 투어도 진행했다. 그리고 유럽. 그들은 The Ed Sullivan Show에 25번 출연했는데 패티 페이지와 루이 암스트롱 같은 미국 스타(각각 18번 출연)보다 많다. 김 자매, 윤복희, 김 패티는 베트남, 미국 등지에서 가수 최초로 데뷔했다. 한명숙 (韓明淑, 1935년생)의 1961년 노래 〈노란 셔츠를 입은 사나이〉은 프랑스 가수 Yvette Giraud (1916~2014)가 커버했으며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에는 신중현, 펄시스터즈, 패티킴과 같은 한국 아티스트들이 이전에 미국에서 공연했다. 군 클럽이 한국 대중에게 다가갔다. 1960년대 중반 영국의 전설적인 그룹 The Beatles (1960년 결성, English rock band)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Add4와 Key Boys와 같은 \"그룹사운드\"가 부상했다. 애드포는 1962년 신중현이 결성한 국내 최초의 록 그룹으로, 비틀즈를 연상시키는 라이트 록 형태의 한국 최초의 로큰롤 음악 《The Woman in the Rain》을 제작했다. 신중현은 한국에서 \"한국 록의 대부\"로 여겨질 정도로 한국 록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서구 대중가요와 한국 록 음악이 부상하면서 한국에서는 트로트가 더 지배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자(李美子: 1941년생) 같은 트로트 가수들은 여전히 ​​〈동백 아가씨〉와 같은 명곡으로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1950~60년대 한국에는 서양 팝 음악, 한국 록 음악, 트로트가 공존했다.
     

    1960년대 말 한국 대중음악은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 미국의 문화와 생활방식(1960년대 히피 운동 포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전쟁과 일제의 영향을 받은 전임자들과 달리 경쾌한 음악을 만든 대학생과 졸업생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젊은 세대는 미국 히피처럼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고, 그 결과 한국 정부는 더욱 자유로운 가사의 노래를 금지했다. 그런데도 포크팝은 여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지역 텔레비전 채널 MBC는 1977년 대학생들을 위한 음악 경연을 조직했다. 이것은 여러 현대 음악 페스티벌의 기반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미국 아래에서 자랐다. 미국에 영향을 미치고 선호했다. 긴 머리, 청바지, 어쿠스틱 기타, 포크 음악으로 표현된 '청소년 문화'를 탄생시킨 생활양식. 그 당시의 민속 음악은 기타 한두 개가 반주하는 노래와 함께 평범하게 부르는 선율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민요의 대부분은 엘리트 대학생과 명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의 활동가들처럼 학생운동을 계기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정치화된 청년들이 선호하는 음악으로 민속 음악을 택했다. 결국, 정부는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민속 음악을 금지했습니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미국 팝 음악과 한국 록 음악을 섹스 및 마약과 연관시킨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1975년 대마초 스캔들로 수감된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 일본 엔카가 트로트에 미친 영향을 감안할 때 정부는 반일신분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적'이라는 이유로 트로트 노래도 금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실제로 트로트를 받아들였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는 미국에서 자라 Bob Dylan (born 1941, American singer-songwriter), Leonard Cohen (1934~2016, Canadian singer-songwriter, poet) John Lennon (1940~1980, English singer, songwriter)의 영향을 받은 Han Dae-soo(한대수; born 1948, South Korean folk rock singer-songwriter)였다. 한대수의 노래 〈물 좀 주소, 물 좀 주세요〉는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과감한 퍼포먼스와 독특한 가창력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한국에서 공연이 금지되었다. 한은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1990년대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외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가수로는 송창식, 조영남, 양희은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DJ도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이광조(李光祚: 1952년생)의 1985년 앨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30만 장 이상 팔린 후 발라드 가수들이 부상했다. 발라드의 왕자 이문세와 변진섭도 인기 발라드 가수다. 이 시대 가장 인기 있는 발라드 작곡가 중 한 명인 이영훈이 2011년 현대 뮤지컬 《광화문 연가》로 편찬되었다.
    아시아 뮤직 포럼은 1980년에 시작되었으며, 이 행사에 아시아 5개국의 대표자들이 경합을 벌였다. 한국 가수 조용필 (1950년생)이 1위를 차지하며 홍콩과 일본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첫 번째 앨범 《창밖의 여자, 창밖의 여자》는 히트했고 그는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오르는 최초의 한국 가수가 되었다. 조용필의 음악 레퍼토리에는 록, 댄스, 트로트와 포크 팝이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록 밴드의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로 록 음악과 인연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의 초기 인기는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트로트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1976년 그의 트로트곡 '부산항으로 돌아가라'는 대히트를 쳤다.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일시적인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0년 100만 장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달성한 〈창밖의 여자〉라는 노래로 반성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3개국어(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그는 〈Seoul Seoul Seoul〉을 불렀다. 
     

    1990년대에 한국 대중 음악가들은 힙합, 록, 재즈, 일렉트로닉 댄스와 같은 미국 대중 음악 스타일을 부분적으로는 유로팝과 대부분 미국 대중 음악 스타일로 통합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K-POP 역사상 혁명적인 순간을 기록했다. 3인조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난 알아요》로 데뷔해 심사위원단에서 최저 시청률을 받았지만 동명의 노래와 앨범이 성공을 거둘 정도로 성공했다. 뉴잭 스윙에서 영감을 받은 비트와 기억에 남는 후렴구, 한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참신한 가사가 이 곡의 성공 요인이다. 그들의 발자취에는 유승준, 지누션, 솔리드, 듀스, 원타임, 드렁큰타이거와 같은 성공적인 힙합 및 R&B 아티스트의 물결이 뒤따랐다.
    1995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의 음반 프로듀서 이수만. 미국 음악의 트렌드를 접하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SM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 멤버 양현석이 YG 엔터테인먼트를, 박진영이 1997년 JYP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10대들 사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엄청난 인기는 한국 가요계의 초점을 10대 중심의 대중가요로 옮겼다. 어린 소년 또는 소녀의 아이돌 밴드는 증가하는 십대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노래와 춤은 물론 에티켓, 태도, 언어, 미디어 대처 능력까지 혹독한 훈련을 거쳐 1996년 데뷔한 최초의 아이돌 보이그룹이다. H.O.T가 부른 〈Candy〉라는 노래. 경쾌하고 경쾌한 멜로디와 에너제틱한 댄스 스텝이 더해져 더욱 부드럽고 부드러운 팝 음악을 선보이며 많은 후속 아이돌 그룹이 채택한 공식이다. 그룹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팬들은 그룹의 헤어 스타일과 패션을 따라했다. 캔디부터 향수까지 그룹 계열사 상품도 판매됐다. 이들의 성공에 이어 Sechs Kies, S.E.S, Fin.K.L, NRG, Baby V.O.X, DIVA, Shinhwa, g.o.d 등 젊은 남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해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90년대 후반에 재능 에이전시는 정규 수업이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 청중에게 어필할 인재를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J-pop에서 사용되는 아이돌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하여 K-pop 스타를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체 및 언어 훈련(때때로 학대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과정을 통해 훈련을 받았으며, 키도 선택되어 일본인보다 평균적으로 훨씬 더 큽니다. 외모에 관해서는 K팝은 가수를 불문하고 청소년기나 때로는 아주 귀여운 표정으로 날씬하고 키가 크며 여성스러운 모습을 강조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들은 유창함으로 인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노력은 K-pop의 시장성을 높이는 동시에 공식적인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 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증가시킨다.
    1990년대에는 크라잉넛(Crying Nut)과 같은 펑크 록 밴드와 불법 언더그라운드 음악 클럽의 등장으로 주류 대중문화에 대한 반동 운동이 일어났다.
     

    K-pop의 증가하는 인기는 한류 또는 한류의 일부를 형성한다. K-pop은 빌보드와 같은 서양차트에 점점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온라인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한국 음악 산업이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가는 데 필수적인 도구였다. 한류의 일환으로 K-pop은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해외, 특히 해외 젊은이들에게 투사하는 도구로 한국 정부에 의해 수용되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K-pop 시장은 침체되고 90년대에 성공을 거둔 초기 K-pop 아이돌 그룹은 쇠퇴했다. H.O.T.는 2001년 해체한 반면 젝스키스, S.E.S., 핑클, 신화, g.o.d 등의 그룹은 2005년까지 활동을 중단했다. 보아, 비 등 솔로 가수들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2003년 데뷔한 보이그룹 동방신기의 성공은 아이돌 그룹이 한국 엔터테인먼트로 부활하고 한류의 일부로 K-POP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SS501, 2005년 Super Junior, 2006년 Big Bang, 2007년 Wonder Girls, 2007년 Girls' Generation, 2007년 Kara의 Shinee(2008), 2NE1(2009), 4Minute(2009), T-ara(2009), f(x)(2009), After School(2009)의 성공적인 데뷔로 2세대 K팝의 탄생했다.
     

    21세기 초에 K-pop 아이돌은 아시아 전역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Baby Vox의 싱글 〈우연〉이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기간 동안 발매되고 홍보된 후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인기를 얻었다. 보아는 K팝 가수 최초로 1위에 올랐다. 일본 오리콘 차트 1위, 직후 비는 베이징에서 4만 관객을 동원한 전석 매진 콘서트를 열었다. 베이비복스는 2003년 3집 앨범 《Devotion》의 중국 싱글 〈I'm Still Loving You〉로 중국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중국 내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다. 태국의 각종 음원차트에서도 차트를 휩쓸었다. 동방신기는 일본에서 K팝 보이그룹의 부상을 알렸다. 2008년 그들의 싱글 〈Purple Line〉은 동방신기를 오리콘 음악 차트에서 보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가수이자 해외 보이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 음악 시장의 상당 부분은 K-POP이 장악하고 있다. 2008년 한국의 문화 수출액(TV 드라마 및 컴퓨터 게임 포함)은 20억 달러로 연간 10%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다. 그 해 일본은 전체 K-pop 수출 수익의 거의 68%를 차지했으며 중국(11.2%)과 미국(2.1%)을 앞질렀다. 콘서트 티켓 판매는 수익성 있는 사업임이 입증되었다. 동방신기의 일본 동방신기 라이브 투어는 평균 109달러에 85만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해 총 926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Psy (박재상 朴載相: born 1977)의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가 YouTube 동영상 최초로 10억 뷰를 돌파하고 주류 미디어에서 널리 보도된 이후 이 장르는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2020년 12월 기준 이 영상의 조회수는 39억 회이다. 보아(BoA), 원더걸스(Wonder Girls), 소녀시대(Girls' Generation), 씨엘(CL) 등 연예기획사들이 영어권 진출을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방탄소년단(BTS)은 2017년 Billboard Music Awards에서 Top Social Artist상을 수상하여, K팝 그룹 최초로 BBMA를 수상했다. K팝 그룹의 첫 AMA 공연인 American Music Awards에서 그들의 노래 〈DNA〉 공연은 Billboard Hot 100에서 67위에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이듬해 방탄소년단은 〈LOVE YOURSELF 轉 'Tear'〉로 K팝 그룹 최초로 Billboard 200 1위에 올랐다. 《Map of the Soul: Persona》는 나중에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으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32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방탄소년단은 2019년 5월 15일 맨해튼 센트럴파크에서 headliners(행사나 공연 따위에서 가장 기대되거나 주목받는 출연자)와 함께 같은 날 Good Morning America의 'Summer Concert Series'를 시작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 31일 밤, BTS는 100만 관중과 10억 명이 넘는 TV 시청자 앞에서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새해 전야 축하 공연으로 다가오는 2020년을 시작했다.

    OTT & 미디어 관련 수혜주

    1. 에이스토리
    - 콘텐츠, 드라마 외주 제작사
    - '시그널' '킹덤' '백일의 낭군님' 등을 제작
    - '바람피면 죽는다' 방영중, '지리산', '빅마우스','W' 등의 드라마를 제작 중
    -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인 아이치이와 국내 및 중국을 제외한 해외 방영권 라이선스를 계약
    - 국내 제작사로는 최초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를 제작



    2. 스튜디오드래곤
    - 콘텐츠,드라마 외주 제작사
    - 네이버와 지분을 교환해 네이버웹툰 IP를 활용한 프리미엄 콘텐츠 제작
    - 네이버웹툰의 자회사인 스튜디오N과의 공동으로 스위트홈 제작
    - '스위트홈'이 약 10여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약 60여개국에서 가장 많이 시청한 작품 10위 내에 진입
    - '지리산', '아일랜드', '간 떨어지는 동거' 제작 중이며 큰 기대를 받고 있음

    3. 삼화네트웍스
    - 드라마,콘텐츠 기획·제작사 
    - 신인 연기자 발굴·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사업 영위


    4. 팬엔터테인먼트
    - 드라마와 음반을 제작,기획,판매
    - 박보검이 출연해 흥행한 tvN 드라마 '청춘기록'을 스튜디오드래곤과 공동 제작
    - 중국 텐센트와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

    5. 키이스트
    - 연예 기획사이자 드라마 제작사
    - '싸이코패스다이어리', '보이스 시리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의 작품을 제작
    - 별들에게 물어봐, 경이로운 구경이, 한 사람만, 일루미네이션 등 제작중 이며 올해 선보일 예정
    - 글로벌 온라인스트리밍서비스(OTT) 플랫폼 디즈니플러스·애플TV와 콘텐트 공급 계약 협상을 하고 있다고 알려짐

    6. NEW
    - 콘텐츠 제작사
    - 국내 4대 배급사 (NEW, 쇼박스, CJ엔터, 롯데엔터)
    - 5개 이상의 작품들을 올해 선보일 예정
    - 현재 '무빙'외 추가 작품들을 OTT향 판매 추진중

    7. 위지윅스튜디오
    - 원래는 컴퓨터그래픽(CG), 시각 특수효과(VFX) 전문 제작사 2019년부터 다양한 드라마 및 컨텐츠 제작사의 인수를 통해 종합 콘테츠 제작사로 자리 잡음
    - 올해 드라마 10편, 영화 2~3을 포함해 30여편을 제작 예정
    - 위지윅이 인수한 ‘메리크리스마스’의 〈승리호〉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 
    8. 덱스터
    - 국내 및 중국 영화, 드라마에 시각특수효과(VFX) 컨텐츠를 납품

    9. 쇼박스
    - 컨텐츠 배급사
    - '비상선언', '이상한나라의수학자', '타워', '싱크홀' 등을 제작중
    - 쿠팡플레이 등에 자사의 영화를 공급

    10. 제이콘텐트리
    - 드라마, 컨텐츠 제작사
    - JTBC와 넷플릭스 등에 콘텐츠를 공급

    디즈니플러스 관련주 ↓
    SM Life Design, IHQ, 키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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