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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13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오늘의 묵상 그리고 독서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오늘의 묵상 그리고 독서

    snsnews 2021. 10. 13. 08:00 Posted by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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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 루가 24, 32<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 루가 24, 32<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공동번역 성경」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걷기는 인문적인 문화가 되고 있다. 해 질 무렵, 동네 공원에 가보면 많은 이웃들이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부지런히 걷는 운동을 하고 있다. 무병장수를 향한 욕망이 가득한 시간들. ‘순례’도 길을 걷는 행위이다. 그러나 순례는 육신의 안녕만을 위한 걸음걸이가 아니다. 볼거리를 찾아 걸어 다니는 관광도 아니다. 순례는 진리를 향한 길이요, 주님을 모시고 함께 걷는 생명의 길이다. 순례란 나의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함께하는 일종의 수행이다. 그래서 순례자는 주변의 물상(物像) 속에서 주님의 섭리를 읽어낼 줄 아는 맑은 눈이 있어야 한다.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은 유장근, 이윤순 부부가 주님과 함께 길을 걸었던 순례의 기록물이다.
     
    「산 위의 신부님」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저자이신 박기호 신부님은 본당 사목 대신 충북 단양에 생태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잿빛 도시를 멀리하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떠나간다. 자본의 세계를 떠나 생태의 세계로 박신부님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느 프랑스 철인은 “걷기는 기도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새로운 가나안이 있는 예수살이 공동체를 향해 박신부님이 걸었던 길이 바로 ‘기도’이다. 이천 년 전 야고보 사도가 걸었다는 복음의 길 . 그 길을 스승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자 야고보 사도께서는 야만의 공간을 걸었으리라. 박신부님의 단양 가는 길과 야보고 사도의 까미노 길은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다. 둘 다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평화의 길이요, 주님과 함께 하는 엠마오 가는 길이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하여 처음 들었던 것은 6년 전쯤이다. 신심(信心) 깊은 한 처자가 아픈 발을 이끌고 프랑스로 향했었다. 그 처자는 한 달 넘게 오카리나를 들고서 카미노를 누볐다. 한 달 뒤, 그 처자는 파란 눈빛이 되어 돌아왔다. 주위 지인들은 그녀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순진’이라 불린 그녀의 카미노 순례담을 듣고 난 뒤부터, 나도 카미노를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한편 산티아고 길에 대한 우려의 풍문도 들었다. 재작년 화순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만난 한 자매님은 산티아고 순례 길이 무작정 몰려드는 한국인들 때문에 순례의 참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싶었다. 한편 작년에는 순천에 있는 한 대안학교 초중등 20여명의 학생들이 두더지라 불리는 교장 선생님과 함께 한 달 넘게 카미노를 걸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내 주위로부터 카미노에 대한 풍문이 연연히 들려왔다.「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를 읽게 된 계기도 카미노에 대한 이끌림 때문이었다. ‘산티아고’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에 이끌렸지만 ‘소울메이트’라는 단어 또한 영성스럽게 느껴졌다.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를 손에 든 나는 유장근, 이윤순 부부와 함께 카미노를 순례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읽었다. 이 두 분 모두 해외여행에 심안이 있은 전문가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닌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는 점이 더욱 끌렸다. 이 두 분은 ‘새로운 삶의 실현’을 위하여 카미노를 걷게 되었다고 했다. 미지에 대한 용기, 직장을 떠난 후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함을 부부라는 이름의 동반자를 믿고 의지하면서 ‘카미노’ 순례를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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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다니지 말 것이며 식향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그 집에 들어 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 마태오 10, 9-12<열 두 제자의 파견> 「공동번역 성경」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길 떠나는 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제자들에게 ‘준비 없이 그냥 가라’고 이르신다. 이 말에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무엇일까? 나는 ‘에고 덩어리’를 벗어던지라는 주님의 뜻으로 이해한다. 에고는 언제나 서둘러 준비해야만 만족하는 습성이 있다. 에고는 늘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준비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미래의 불안과 걱정의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뜻이다. 편안함과 안전만을 집착하려는 에고를 이겨내고, 다만 성령께 모든 것을 내맡겨 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밝혀서 성령의 이끄심을 체험하라는 주님의 뜻인 것이다.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의 유장근, 이윤순 부부는 예수님 말씀과 달리 많은 준비를 한다. 미리 먼 길을 주말마다 걸어보기도 하고, 배낭의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인다. 심지어 배낭이 자주 닿는 신체 부위까지 염려하여 대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장근씨 부부는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 예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하셨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카미노를 준비한 자는 걸을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 머무는 마음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집착 없이 길을 가라는 말씀이다. 어찌 ‘카미노’ 걷기에만 해당되는 말씀이겠는가? 우리가 인생길도 마땅히 이런 마음으로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이 임하면서부터 진리 즉 하느님을 향한 길이 시작됩니다.” 내가「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에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구절이다. 성스러운 하느님의 영을 내 안에 모실 때 진리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하는 순례자는 고통마저 귀한 배움이 된다. 유장근 씨는 카미노 순례 도중에 발에 물집이 잡혀서 고생을 한다. 그러나 물집 때문에 병원을 찾아 이리저이 헤매는 것도 아니고, 일정을 단축하지도 않는다. 그저 형편 맞춰 걸어갈 뿐이었다. 오히려 부인의 위로를 받으면서 부부의 사랑을 새롭게 이해를 하게 된다. 성령과 함께하는 순례자는 고통마저도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는 모양이다.
     
    우연한 삶이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신앙 또한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우연 아닌 필연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필연적 일어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몽땅 연필’이라고 하셨다. 또 어떤 눈 맑은 이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피리’라고 하셨다. 나의 모든 행위가 주님의 뜻 아님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장근 씨가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부활 성야 영어 독서자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유장근 씨가 카미노 순례를 하고자 하는 첫 마음을 심었던 곳이 서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주님의 마음은 우연을 가장하고 다가온다. 우리들은 일상의 우연을 필연으로 읽을 줄 아는 투명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카미노는 일탈이다. 지금의 생활을 철저하게 벗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미노는 일종의 버림이다. 버려야 채울 것이 생기나 보다, 나는 나의 일상을 버림으로써 일상의 평범한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나를 채울 수 있었다.”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305쪽
     
    카미노 순례를 다 마친 후, 유장근, 이윤순 부부는 버림의 미학을 깨달을 수 있었노라 고백하고 있다. 무엇을 버렸다는 말이며, 무엇을 채울 수 있었다는 말일까? ‘나’라는 에고를 버리고 ‘하느님의 영혼’을 채운다는 의미가 아닐까? 고난만큼이나 순례가 주는 감동은 컸을 것이다. 내가 오롯이 우주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더 나아가 나와 모든 세상이 하나 된 듯 다가오는 벅찬 일체감.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영적인 황홀감이 주는 선물은 컸을 것이다. 성 야고보 사도가 걸었던 복음의 길을 초로(初老)를 앞 둔 부부는 순례를 통하여 남은 생의 이정표를 새롭게 세웠을 것이다. 
     
    순례자로서 하늘이 준 선물은 당연히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순례자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회향(回向)’이라는 귀한 말이 있다. 자신의 영적성장 결과를 뭇 생명들에게 돌린다는 말이다. 카미노의 최종 종착은 바로 ‘회향’에 있다. 순례 도중에 흘렀던 많은 땀, 육체의 고통, 막연한 불안함, 또는 뜻하지 않았던 동료 순례객들의 환대와 사랑, 의미 깊던 미사와 고즈넉했던 오래된 성당의 장엄함, 붉은 노을, 파아란 여명의 아침, 철십자가 아래 묻었던 기도문 등. 이 모든 카미노의 의미를 회향하여야 한다. 나 홀로 감동적이었던 순례길이 아닌, 나와 남을 살리는 평화의 길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힘들게 걸었던 만큼 세상이 더욱 주님의 자비로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회향’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부터 뭇 생명의 터전인 강줄기를 잡겠노라 야단이었다. 생태 파괴 가 뻔한 반생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욕망을 향한 암몬의 무리들은 무섭게 강줄기를 삽으로 헤집었다. 세상은 경제를 발전시켜 모두가 부자가 되자는 선동만 가득했다. 이 거짓됨에 저항하고자 뜻있는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성직자들 모였다. 이들은 한 겨울을 뚫고 100일 가까이 4대강을 순례하면서 생명 파괴의 사실을 하늘에 고했다. 나도 4대강 개발 반대 성직자 순례에 뜻을 더하고자 한강 길과 영산강 길을 두 차례 함께 걸었다. 한강은 겨울에, 영산강은 봄에 걸었다. 순례 도중에 만난 강줄기들은 다가오는 운명을 모르는 착한 아이와도 같았다. 
     
    순례 도중에 주어진 휴식은 달콤했다. 한편 새로운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순례단원 중에 의정부교구 소속 신부님이 한 분 계셨다. 나는 신부님과 함께 4대강 파괴를 걱정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가끔 나누었다. 의정부교구 소속이신 신부님은 젊었고 키가 컸다. 별 말씀은 없었다. 한강에서 처음 뵙던 신부님은 푸른빛이었다. 봄에 영산강 순례에서도 뵈었다. 그때 신부님은 투명한 색이었다. 휴식 시간에 풀밭에 앉아 강을 바라보던 신부님은 얼굴은 투명해 보였으나 세상은 어두워가고 있었다.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바로 이런 분들의 순례길이 하느님 나라는 만드는 걸음임을 믿는다.
     
    카미노 순례 후, 유장근, 이윤순 씨는 주님이 보기 좋으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소박한 걸음을 내딛는다. 유장근 씨가 호스피스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호스피스 봉사란 생의 마감을 앞둔 죽음의 순례자에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거룩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카미노 순례를 잘 마친 유장근 씨에게 ‘호스피스 봉사’는 의미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느님의 비둘기가 순례자 가슴에 내려 온 것이다. 
     
    나는 「산티아고의 소울메이트」를 읽고 난 후, 훗날 카미노 순례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땀에 젖은 티셔츠와 풀 죽은 모자를 눌려 쓰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나의 모습을. 스승 예수의 죽음이라는 아픔과 부활이라는 희망을 전하고자 이 천 년 전에 야고보 사도가 걸었다는 그 카미노를 즐겨 걷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나는 어김없이 학교로 출근해야 한다. 그곳에서 생기 찬 사춘기 여학생들의 생명 가득한 소리에 시달리다가 별이 뜨는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올 것이다. 내 인생은 결국 길 위에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모든 내 삶의 길이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카미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성령과 함께 내 삶의 카미노를 묵묵하게 거닐어야한다. 나는 ‘주님의 피리’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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